봉선화가 영국 RHS 은메달을 받았다 — 식물세밀화 5인전 'Nature Holic IV' 57th갤러리봉선화가 영국 RHS 은메달을 받았다 — 식물세밀화 5인전 'Nature Holic IV' 57th갤러리

손톱 물들이던 봉선화, 머릿기름 짜던 피마자… 우리 여인들의 전통 화장 식물을 그리다
툇마루에 앉아 이웃집 언니들과 손톱에 빨간 물을 들이던 여름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면 손톱뿐 아니라 이불 여기저기에도 꽃물이 번져 있었다. 심지도 않았는데 장독대 근처에서 여러 포기가 쑥쑥 올라오던 그 꽃, 봉선화다.
김현숙 작가는 그 여름을 종이 위로 불러냈다.
"씨앗이 들어 있는 열매 주머니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을 봉선화가 소환해 준다. 옛날에는 아마도 신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빨그스름하게 물든 손톱을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마음도 아름다운 꽃물로 물들었을 것이다." — 김현숙 작가노트 중에서
그 봉선화(Impatiens balsamina L.)가 지난해 영국에서 메달을 받았다.
■ 영국 왕립원예협회(RHS)가 알아본 우리 화장대
영국 왕립원예협회(RHS, Royal Horticultural Society)가 해마다 여는 보태니컬 아트 & 포토그래피 쇼(RHS Botanical Art & Photography Show)는 식물세밀화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까다로운 무대로 꼽힌다.
2025년 런던 사치갤러리(Saatchi Gallery)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Traditional Cosmetic Plants of Korean Women(한국 여인의 전통 화장 식물)」 연작이 은메달(Silver Medal)을 받았다. RHS 기록에 이 팀은 '첫 출품(First time exhibitor)'으로 적혀 있다. 처음 문을 두드린 자리에서 곧바로 메달을 받은 것이다.
주제는 거창하지 않았다. 작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전통적으로 천연 화장 재료로 쓰여온 대표적인 몇몇 식물들"이다.
화장품이 공장에서 나오기 전, 수백 년 동안 우리 여인들의 화장대는 마당이었고 뒷산이었다.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였고, 씨앗에서 짠 기름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백희순 작가가 그린 피마자(蓖麻子)가 그렇다. 기원전부터 재배해 연료로, 약재로, 화장 재료로 써온 식물이다.
그 은메달 작품들이 이번 「Nature Holic IV」에 함께 걸린다.

■ 식물세밀화는 예쁜 꽃 그림이 아니다
식물세밀화(Botanical Art)는 감상용 꽃 그림과 다르다.
뿌리를 캐서 씻고, 씨앗을 반으로 가르고, 잎 뒷면의 털까지 세어 옮긴다. 한 화면 안에 뿌리와 줄기, 잎, 꽃, 열매, 씨앗이 나란히 놓인다. 계절이 서로 다른 부위들을 한 장에 모으려면, 작가는 그 식물을 최소 한 해 동안 지켜봐야 한다.
목적이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 순간의 한 개체를 찍지만, 세밀화는 여러 개체를 관찰해 '그 종(種)이 대체로 어떠한가'를 그려낸다. 백 년 뒤 누군가 이 그림만 보고도 그 식물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 각국의 식물원과 수목원이 오늘날까지 세밀화가를 두는 이유다.
황기숙 작가는 그 시간을 이렇게 적었다.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식물만의 작은 질서와 신비함에 깊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식물을 그립니다. 한 생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 황기숙 작가노트 중에서
식물은 그에게 "계속해서 붓을 잡게 하는 단단한 희망"이다.

■ 자연에 '푹' 빠진 다섯 사람
네 번째를 맞은 이 그룹전의 작가들은 스스로를 "자연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김현숙, 안미경, 백희순, 전윤경, 황기숙. 모두 (사)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세밀화위원회 소속이다.
작가노트의 문장들은 짧지만 결이 다르다.
안미경 작가에게 식물은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존재들"이다. 전윤경 작가는 조금 더 솔직하다. "관심과 애정을 주니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식물. 빠져든 시간은 행복과 괴로움이 공존한다"고 썼다. 몇 달을 한 포기 앞에 앉아본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다.
다섯 사람의 개성은 서로에게 "순한 빛으로 전해져 혼합되고 투영"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은 과학 도판에 머물지 않는다. 길가 틈새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 유연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읽어내고, 땅에 뒹구는 낙엽에서 그리움을 본다. 푸른 하늘을 향해 초록을 뻗는 나무의 "힘찬 아우성"을 그린다.
작가들은 "자연의 향기, 아름다움, 고요함마저 가능하다면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향기를 그리겠다는 말이다.
■ 엿새뿐이다
「Nature Holic IV」는 9월 2일 수요일 문을 열어 7일 월요일 닫는다. 57th갤러리 2층 전시실이다.
영국에서 은메달을 받은 그림을 국내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다. 봉선화 꽃물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도, 그런 여름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도 엿새는 짧다.
〈사진 = (사)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세밀화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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